Archive for 6월, 2009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종교의 유무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천국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본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여기 적어본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화”  되었다. 즉, 예수님과 같은 의지 (모든 사람을 조건없이 사랑)를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촛점을 맞추지 말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의지와 그 의지의 실천을 행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곳에는 선과 악이 없다. 왜? 악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이기와 이타가 없다.  남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곧 남을 위하는 것이된다.

자신의 한도 내에서 남을 도와주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아니하고, 도움은 필요한 만큼만 가벼운 마음으로 청하고 또 기꺼이 받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을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부러워 하지 않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거나 측은해 하지 않는다.

이긴 자와 진 자가 있을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진 자는 이긴 자를 시기, 질투하지 아니하고, 이긴 자는 교만하지 않는다.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못생긴 사람은 잘생긴 사람을 부러워 하지 아니하고, 잘생긴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똑똑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춤을 잘 추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일을 잘하는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허나 그것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각각 자신의 개성/취향이 있으며, 자신이 어떤 능력/환경을 가지고 있던지간에 존중 받으며 역으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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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가 그린 천국의 모습이 꼭 우리가 죽은 다음에 혹은 심판의 날 이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지금 현재, 예수님과 같은 의지와 실천으로 위와 같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미 천국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이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천국에서의 것보다 갑절은 더 힘들꺼다. 왜냐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전부가 아직 “예수님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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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가는 길은 일차선이 아니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께서 말씀하신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예수 천국)

과연 그럴까?

이 쯤에서 나오는 아주 유명한 질문이 있다. “그럼, 예수님을 전혀 몰랐던 옛날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이 천국에 갔냐 못 갔냐?”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제일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든 인간을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셔서 직접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정수를 보여주신 분 아닌가…

이런 분을 마치 유치한 어린이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예수 천국” 아닌가? “너 나 안 좋아? 그럼 나 너랑 안놀아.”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불신 지옥”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건 하느님, 예수님을 유치한 어린이 수준에서 동네 양아치, 조폭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 아닌가? “너 내말 안들으면 죽을 줄 알아.”

꼭 예수님, 하느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없이 개인적, 인간적 입장에서 잠깐만 생각해보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한테 이런 행동(나 진짜 좋고 착한 놈이거든, 근데 너 나 안 믿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너랑 안 놀고 고통준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예수 천국”의 믿음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이기주의 (내 종교가 최고고 다른 종교는 틀리다.), 편가르기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의 실천일까?

천국에 갈지 못갈지 결정은 오직 하느님만이 내리신다.

나는 생각한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일차선이 아니라고…왜냐고?

하느님은 치사하고 편협하고 교만하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 (당신을 믿던 말던, 착하던 나쁘던)을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허나, 내가 믿는 확실한 것 하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확실한 길이며,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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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바꾸는 비결

“의지의 발현은 삶이다” 를 깨닫고 난 후 내 삶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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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의지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의지 창조란 말이 참 거창하게 들릴 수 있는데… 한 번 실생활에서 그 예를 들어보자.

내 아내는 나를 수동 삼돌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인즉,

첫째, 절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 스스로 알아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일이라 함은 집안 일, 청소, 설거지등등.

둘째, 일을 시켜도 꼭 시킨일만 한다.  식탁을 닦으라 일을 시키면 딱 그것만 한다. 옆에 휴지가 있어도 버리지 않는다.

세째, 일을 해도 잘 못한다. 식탁을 닦긴 닦는데 깨끗하게 닦진 못한다. 결국 아내가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아내는 항상 말한다. 나는 아내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최고인데 몸이 안따른다고…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삶은 의지의 발현이다” 관점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아내가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는 그 의지가 자발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위 예는 단지 집에서 일어나는 경우지만, 모든 생활 속에서 생각해봐라. 회사에서 일할 때등등…일 잘하는 직원과 못하는 직원들을 잘 생각해봐라.

자 다시 의지 창조의 진짜 예를 들어보자.

오늘 집에 손님이 많이 온단다. 아내가 부탁한다. 창고에 있는 간이의자 두개를 빼달라고.

오늘 나는 의자 두개를 갖고 왔다. 보니까 먼지가 많이 쌓여 있더라. 나는 생각한다. 의자를 가지고 온 이유는 손님이 앉기 위함이다. 그럼 당연히 먼지를 없애줘야지하며 걸레로 닦았다.

옛날의 나였으면, 의자 두개만 달랑 거실에 갖다놓았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한 것은 “의자 갖다놓아 달라는 아내의 의지”를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내 의지로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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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의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의지 인식은 의지 창조의 보너스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진실로 알고 자신의 것으로 해석할 때에만 의지 창조가 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의지를 인식할 수 있다.

의지를 인식하게 되면 좋은 것 하나: 행동과 의지가 공명할 수 있게 된다.

행동이 더욱 더 진실하게 되며 진심(의지) 전달이 더욱 잘 될 수 있다.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 어느 아가가 너무 귀엽다고 느끼지만, 다가가서 예쁘다. 귀엽다 얘기하는게 뻘쭘해서 잘 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혹은 자기 아기라 할 지라도 자신의 마음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가라고 생각하는 것)을 잘 표현하는가?

아가가 귀엽고 예쁘다는 것을 의지로 의식(인식)한 후 한번 행동해 봐라. 왜 뻘쭘함이 있을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뭐가 부끄러울 것인가?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자신의 의지에 충실한 행동에는 진심이 품어져 나올 수 밖에 없다. 즉,  상대방은 더욱 나의 진심(의지)를 잘 느낄 수 있을 거다.

삶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 내 한마디 한다. 의지를 창조하고 인식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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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를 창조하라

“니체는 인간의 삶 자체가 (권력)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즉, 인간의 사고도, 행동도, 인식도 모두 (권력)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지”란 스피노자가 얘기한 “욕망”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간단히 말해 인간은 자신이 의지하는대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의지/욕망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삶은 의지의 발현이다” 라는 이 말을 곰곰히 씹어보니 정말 많은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

“왜 나는 끈기있게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해내지 못하는가?” 에 대한 대답.

예를 들면,  골프치는 것, 운동하는것, 공부, 일 열심히 하는것 등등… 작심삼일이라고, 열심히 해야지 하고 결심한 후 얼마 안가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이제껏 열심히 해야지 하고 결심한 것들이 진실로 진심으로 내가 원했던 것이었나… 골프는 사회 생활을 위해서 배워야 한다하고, 운동은 건강에 좋으니까, 공부는 보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일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다 나름 이유가 있긴 있었지만, 그 어느것 하나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의지는 아니었다.

어이없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제껏 살아오며 내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의지를 두가지로 분류해보면,

1. 자발적 의지 (스스로 창조하는 의지)

2. 1번이 아닌 의지 (자신으로부터가 아닌 사회 일반적 관념 혹은 남의 관점으로부터생성된  의지).

오로지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의지를 창조한 경우에만 그 의지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아무생각이 없거나 남의 것을 따라하는 의지는 진실로 자신이 갈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쉽게 소멸하는게 당연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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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니가 짱먹어라

“들뢰즈는 언젠가 칸트 철학과 접속했던 자신의 작업에 대해 그것은 사생아를 낳는 것과 같았다는 말을 합니다.

칸트가 보기에 절대로 자신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칸트적인, 칸트조차 의식할 수 없었던 칸트 철학의 면모를 드러내는 작업이었죠.

그런데 들뢰즈는 니체 철학과 접속한 것에 대해서는 반대로 말했습니다.

칸트에게 그의 다른 면모를 보여 준 것처럼 니체에게도 그런 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니체가 자신을 덮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에서 니체가 인정할 수 없는 사생아를 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생아를 낫는다는 것은 니체의 해석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주관에 따라 재해석, 창조 함으로써 이룰수 있는 일인데,

니체가 주장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만의 기준으로 기존의 그 어떤 것도(도덕, 종교, 관습, 철학) 파괴하거나 재해석하여 자기 자신의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니체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니체의 선과 악, 진리를 떠나 단지 “난 놈”이 되라는 이 주장은 절대 무너질 수 없는 것이 되버린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내 한마디 한다.

니체 니가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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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니체

니체는 인간을 딱 두 분류로 나눈다.

1. 자기 자신만의 기준으로 기존의 그 어떤 것도(도덕, 종교, 관습) 파괴하거나 재해석하여 자기 자신의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

2. 그렇지 못한 사람.

니체가 보기엔 1번 사람은 난 놈(초인) 이고 2번 사람은 못난 놈이다.

니체는 말한다. 1번 사람이 되라고.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나폴레옹을 난 놈이라고 했다.

나폴레옹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바로는 강력한 개인의 출현을 위해 대중을 사용한 나쁜 놈이다….. 이걸 가지고 니체의 시대적 판단 오류가 아닌가 혹은 니체 철학이 파시즘에 이용되었다고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니체의 인간 분류법에는 선, 악이 없다. 나폴레옹이 나쁜 놈인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지……선, 악은 개인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므로 니체입장에서 나폴레옹은 분명 난 놈이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철학을 이용해 히틀러를 초인이라 부르며 파시즘을 지원했으나.. 니체는 그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히틀러, 니체의 정의에 의하면 난 놈 맞다. 중요한 사실은 그 난 놈이 어떤 의지를 가졌는지에 따라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각 개인 (혹은 신)에게 달려있는 거다.

니체는 다른 철학자들처럼 무엇인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과 악인지에 대해 혹은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지 1번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또한, 니체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그리고 모든 기존의 관습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파괴했다.

허나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파괴한 그 폐허속에서 니체는 새로운 그 자신만의 해석을 통한 선과 악의 기준 그리고 하느님을 만났을 거라고.

종교를 믿는 자들은 니체의 사상에 접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것을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꼭 다 파괴할 필요 또한 없다.

니체가 추천한 것처럼 1번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다고 치자. 그 후 자신의 믿음, 신념이 그 전과 똑같을 수도 있는 거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더욱 더 강렬한 확신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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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두개 빼고.

* 토라(tora)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으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경전으로 삼고 있는 중요한 문서다.

토라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토라에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마침표를 어디다 하느냐등등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 스피노자가 한 말중 하나: 신은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두개 빼고..

1. 욕망하지 않는 것.

2. 할 수 없는 것.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원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신이 허락했다는 말이 된다.

토라에서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해석하기 나름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운명도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인간의 의지를 사용해서 무언가를 이루고 바꿀수 있는 것까지도 이미 허락되어 있다는 말이다.

두번째 조건이 참 재밌는 거같다. 모든 것을 원한다고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엿장수 맘대로인것 처럼 신맘대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첫째, 자신이 무얼 욕망하는지 알아야 할 것. (니체에 의하면, 힘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가 아닐까 한다.) 둘째, 자신이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것.

진심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것을 아는 것.. ..이것도 참 쉽지 않은 과제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제껏 나를 포함)..

자 첫번째 단계를 통과했다고 해보자. 두번째 관문, 내가 할 수 있나 없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꺼다.

그럼 뭐냐? 수없다. 그냥 해보는 수밖에….할 수 없는 것 자체도 운명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며 열심히 해보는 수밖에 (여기서 니체의 아모르 파티와 일치하는 것 같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두려워 말고 그냥 해봐라.

왜? 신이 허락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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